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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자글쓰기IV-책 읽기; 인생에서 경쟁력의 원천
2005-01-02 01:59:26 조회수2760
임재춘의 과학기술자글쓰기 ========================================================== 나는 학창시절에 어학을 가장 싫어하였다. 계산하는 것을 좋아해 수학과 과학은 재미가 있는데 국어는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국어를 잘 하지 못하니 영어는 더욱 한심하여 대학은 자연히 이공계를 지원하였다. 기계를 전공하면서 골치 아픈 국어와 영어는 기분 좋게 결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싫은 것을 피해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73년에 기술고시에 합격하고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에 발령을 받았다. 출근을 하니 근무 파트너로 미국인이 한명 있었는데 그는 국제원자력기구( 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Institute)에서 파견한 원자력안전 자문관이었다. 소개를 받는 자리에서 나는 영어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쩜 내 이름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참담한 만남이었다. 당장 영어가 급했기에 카세트부터 장만하였다. 일본 제품이 막 나온 때라 봉급의 세배나 되어, 방송사 기자나 겨우 들고 다닐 정도로 귀한 것이었지만 과감히 투자를 하였다. 'English 900'이라는 교재를 구해 낮이나 밤이나 6개월을 들었더니 귀가 튀였다. 이로써 영어는 해결이 되어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쓰라린 글쓰기 국어 문제는 좀 더 뒤에 왔다. 사무관이나 과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내가 글을 잘못 써도 상사가 마지막에 고쳐 주니 기껏해야 꾸중 듣는 정도였다. 그러나 중앙부처 국장쯤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문제의 글은 방사성폐기물 부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정부는 1990년에 안면도를 방사성폐기물 처분부지로 지정하기 위해 비밀리에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안면도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계획은 취소되고 장관, 차관 및 원자력국장이 줄줄이 물러났다. 새로운 장관에는 언론계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과학자 출신의 장관이 방사성 폐기물 부지 확보와 같은 매우 민감한 사회적 사안을 풀어내기는 어렵다고 대통령이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후임 원자력국장에는 내가 임명되어 1년 내에 폐기물 부지를 확보하는 중책을 맡았다. 안면도에서 교훈을 얻은 정부는 폐기물 부지를 ‘정부가 지정하는 방식’에서 ‘공개 모집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공개 모집 방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 단체와 지역 주민이 그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 위험은 크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에 신문에 공고하는 문안이 중요했다. 나는 공고 문안을 유명작가에게 의뢰한 후 주요 일간지 1면들을 잡아 두었다. 신문에 싣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는데 나오기로 한 원고는 더디기만 했고 독촉 끝에 받아 본 문안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없었던 나는 밤새워 공고 문안을 다시 만들어 새벽에 장관에게 팩스로 보냈다. 나의 공고 문안을 받아 본 장관은 크게 화를 내었고, 그 날 오전에 나는 원자력국장에서 물러나 대전으로 내려갔다. 과학기술처에서 젊은 국장으로서, 원자력 전문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나에게 이 일은 충격이었다. 조직의 장이 부하를 팽개치니까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맛보았다. 권력은 공무원에게 당연한 것이고 주위사람이 받들어 모시니 내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진정한 경쟁력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특히 승진이 빨라 공무원을 일찍 그만 둘 가능성이 컸다. 글쓰기 방법을 터득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나에게 국장급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화를 지향하면서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에게 해외에서 1년간 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배워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MBA가 하고 싶었다. MBA는 통상 2년이지만 다행히 1년에 이 과정을 제공하는 영국의 란카스트 대학을 찾아내었다. 나는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방학기간 동안 열리는 Technical Writing(TW;기술글쓰기)을 수강하였다. 수업 첫 시간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때까지 내가 배운 글쓰기와는 달랐다. 사실 나는 그동안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 작문 교재, 논술 길잡이, 문장론, 보고서 작성법들을 틈나는 대로 찾아보았으나 결과는 불만스러웠다. 내용이 지루하고 알아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아 목차만 보아도 질렸기 때문이다. 영어 TW교육도 두 차례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미국에서 1년간 정부기관인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비엔나에서 2년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에도 TW 교육은 필수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각각 3개월 정도 배웠다. 그러나 이 TW 교육도 미국 정부나 국제기구가 사용하는 문서 형식에 주로 치우치다보니 글쓰기의 근본 문제와는 거리가 많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국 란카스트 대학에서 첫 수업시간에 교수가 글의 구조와 논리 전개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는데 나는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글의 구조를 잡고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방법(다음 연재에서 이 부분을 다룰 예정임)만으로 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전이 필요했다. MBA 수업에서 매주 한번 정도는 리포트를 제출하는데 나는 기껏해야 한두 쪽 이상을 적기 힘들었다. 영국 학생들은 15 쪽 내외의 리포트를 잘도 적어내 부럽기 그지없었다. 공부 자체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인데 글쓰기에까지 시간을 뺐길 수 없어 나는 리포트를 대강 써서 냈다. 결과는 나쁜 성적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마케팅 과목에서 낙제하여 재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재시험이 하나라도 더 나오면 학교를 떠나야 했기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글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해보니 생각만큼 시간을 많이 빼기지도 않았고 몇 번 하지 않아 속도도 빨라졌다. 학교에서 배운 아마추어 글쓰기는 직장의 프로 글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1994년에 북한 핵문제가 심각한 국면에 있을 때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에 과학관으로 발령받았다. 이곳에는 당시 외무부내에서도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난 이시영대사(전 외무부 차관 및 유엔 대사, 현 전주대 총장)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분은 내가 두 장으로 써 올린 문서를 새빨갛게 고쳐 반장 정도로 줄였다. 나는 보고 내용을 일어난 시간 순으로 장황하게 적었지만 대사는 중요한 것부터 간결하게 정리하여 읽는 사람이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글로 바꾸어 놓았다. 글이 고쳐질 때마다 호된 꾸중이 뒤따라 직장에서 글 쓰는 요령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터득할 수 있었다. 이공계 글쓰기 전파에 나서 나는 기술고시에 합격하여 26 년간을 과학기술(처)부에서 근무하면서 기술직 공무원들의 보고서 작성이나 보고 요령이 행정직에 비하여 뒤떨어짐을 보았다. 고위직으로 올라 갈수록 기술직 공무원의 수가 현저하게 적어지는 현상도 글쓰기나 보고 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읽고 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 능력은 곧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쓰기를 잘 하지 못해 경쟁력이 약한 이공계 출신 기술자나 과학자를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술글쓰기 기법' 전파에 나섰다. 원자력연구소 감사로 있으면서 연구원을 위한 강좌를 만들었다. ‘주요내용을 알기 쉽고 간결하게’ 쓰는 ‘기술글쓰기 기법’에 더하여 우리나라 기술자와 과학자가 많이 틀리는 부분을 정리하여 4시간짜리 강의를 시작하였다. 성과는 놀랄 만 한 것이었다. 연구원이 4시간 수강으로 글쓰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연구소에서 자신을 얻은 나는 이공계 대학생을 위한 ‘의사소통기술’과목을 개설해 영남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공대에서 이렇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강의를 들을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힘을 얻어 웹사이트 ‘임재춘의 과학기술자 글쓰기’ ( www.tec-writing.com)을 개설하여 운영하는 한편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 ’의 책을 썼다. 이 책의 반응도 매우 좋아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에서 1년 이상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과 대학도 기술글쓰기에 관심을 가져 요즈음 나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바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막 시작한 우리나라의 기술글쓰기 기법이 빠른 시일 내에 정착하도록 힘을 쏟고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Technical Writer가 각광을 받는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보산업과 생명공학산업이 새롭고 복잡한 기술을 하루가 다르게 양산하면서 이들 기술을 사용자에게 알기 쉽게 설명할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US News and Report'지가 21세기 유망직종 ‘Top 20’중 하나로 Technical Writer를 꼽을 정도이다. 그러하기에 미국은 TW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150여 곳이나 되고 TW를 직업으로 하는 프리랜서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모여 운영하는 협회 성격인 The Society for Technical Communication도 5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글쓰기의 원동력인 읽기와의 인연 오늘 이렇게 글쓰기로 인생 2모작을 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던 일이다. 돌이켜보면 직업으로서의 나의 글쓰기는 글 읽기에서 시작하였다. 글 읽기는 1모작인 공무원으로 내가 진출해서 공무원으로 자라고 대학의 강단에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대구 중구 종로동에서 태어났다. 종로동은 대구 시내 한 중간이지만 빈민촌이었다. ‘마당 깊은 집’을 읽어 본 사람이면 6.25 직후의 대구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장관동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장관동은 종로동과 길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지만 종로동에 비하면 고급 주택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14평 정도의 양철 지붕 판자집이었는데 10명의 식구가 살았다. 이런 판자촌 동네에서 자라다보니 노는 것이 일이었다. 중학교는 1,2차 시험에 모두 떨어져 경상중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성적은 하위였다. 내가 자란 동네도 공부를 어렵게 하였지만 더 문제는 나의 시력이었다. 시력이 0.1로 매우 나빴지만 안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른 앞에서 어린놈이 안경을 쓴다는 것은 건방지다고 보는 세태이었기에 아버지께 안경을 사 달라고 했다가 혼 만 났다. 나는 키가 커 제일 뒤에 앉는데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필기를 할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짝의 노트를 보고 필기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마저 곧 포기하였다. 공부 시간에 할 일이 없었다. 도서실에 가서 소설책을 빌려 공부 시간에 읽었다. 하루에 한권씩 읽어 나갔다. 이런 학교생활을 3년 정도 하고 나니 소설책을 펼치면 앞부분 몇 쪽만 보아도 이야기 전개가 짐작되었다. 그러다 환경이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서성로에 있는 한옥 단독주택이었다. 동네가 얼마나 조용한 지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겨울방학이 되자 심심한 것이 극에 달했다. 이렇게 심심할 바에는 공부나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입시 40일 전이었다. 내가 공부할 교과서를 모두 모아보니 40권이었다. 읽기 능력이 경쟁력을 발휘 하루에 한권씩 공부하기로 했다. 수학과 영어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낮 시간에 하는 것으로 하고 밤에는 7시간정도를 배정하여 교과서 한권씩을 공부해나갔다. 어차피 100점을 맞을 수는 없으니 80점 정도를 목표로 했다. 80점 정도야 교과서를 소설책 읽듯이 한번 읽어보면 전체 내용의 흐름은 이해가 되었다. 꼭 외워야하는 부분은 따로 한 두 시간을 할당하여 노트에 정리해 두었다. 이런 공부방법으로 대구에서 ‘일류’측에 끼는 계성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공부는 나에게 정말 쉬운 것이었다. 우선 안경을 아버지 몰래 장만하였다. 수업시간 3분전에, 나는 얼른 교과서를 펴서 지난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 점검하였다. 선생이 교실에 들어와 출석을 부르는 동안 나는 그날 배울 내용을 훑어보았다. 출석에 이어 선생이 지난 시간 배운 것과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해 설명하면 이것만 잘 들어도 어느 부분이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중요한 부분은 수업시간을 이용해 자습을 하고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해 놓았다. 이렇게 하니 집에서 따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은 아주 좋게 나왔다. 공부가 이렇게 쉽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학은 영남대학교 기계과에 4년간 전면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특차로 들어갔다. 서울로 가기에는 동생들 네 명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경제적인 부담이 너무 컸다. 대학생활은 주위의 분위기가 온통 노는 것이어서 나도 원 없이 놀았다. 군대는 내가 눈이 나빠 몇 년을 버티면 면제가 되겠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수 없는 문제가 있어 아예 콘택트렌즈를 끼고 이 사실을 숨긴 채 ‘갑종’합격을 받았다. 보병으로 전방에서 근무를 했는데 졸병으로 근무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 나름대로 조직이나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데 졸병에게는 조금도 융통성이나 창의력을 인정하지 않아 고참들로부터 많이도 시달렸다. 제대를 하고 4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하니 곧 취직 문제에 부딪쳤다. 기업에 취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신입직원은 아무래도 ‘졸병’신세를 못 면할 것 같았다. 기술고시를 보면 적어도 중간관리부터 시작할 수 있어 기술고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고시와 유학도 글 읽기 덕분 10개월 준비로 기술고시에 합격했다. 1차에 4과목, 2차에 8과목이어서 양이 많았다. 특히 행정법은 2차에서 주관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공대생에게는 생소한 과목이어서 만만치 아니한 공부였다. 국사도 주관식이어서 쉽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학교 때의 글 읽기가 있었다. 아무리 두꺼운 책도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나에게 두 번의 공부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도 글 읽기 경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1982년에 나는 뒤늦게 원자력석사 과정을 밟기로 작정했다. 내가 일하는 분야가 원자력인데 전공이 기계라 마음 한구석에는 늘 원자력석사를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과장으로 승진해 있어 때늦은 감이 있었지마는 강행했다. 2년을 비우기는 조직에 미안하여 1 년에 마치는 석사과정을 준비했다. 미국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를 선택했다. 4번의 Quarter(학기)로 석사를 마치기에 1년 내내 정신없이 공부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첫 학기에 4과목을 듣는데 수학과 물리가 문제였다. 대학 1학년 때 수학과 물리를 배웠지만 16년 전이어서 그것을 기억해 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수업에서 다루는 것이 아예 그러한 ‘고전적’인 내용이 아니고 ‘Special Topics’이라고 해서 최신 학문의 동향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 과목들은 교과서도 없어 내가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학기가 시작하고 두 번째 주에 수학을 ‘drop(취소)'하고 ’audit(청강)‘로 변경했고, 그 다음 주는 물리도 그렇게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다음 학기에도 이어지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능력 밖이었다. 이마저 취소하니 결국 한 과목만 남았다. 결국 첫 학기는 한 과목에 집중해서 A를 받았다. 두 번째 학기는 아예 3 과목만 신청을 하였고 3 과목 모두 A를 받았다. 두꺼운 공학책이지만 공식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핵심 파악에 주력한 것이 효력을 발휘하였다. 복잡한 공식은 어떻게 전개 되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만 이해하고 상세한 과정은 건너뛰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복잡한 공식이 시험에 잘 나오지 않을뿐더러 나오더라도 틀리면 되었다. 틀리더라도 이 공식에 대한 이해는 잘하고 있는데 짧은 시험시간에 미처 이를 풀어 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핵심단어 몇 개만 적어 놓았구나 하는 느낌을 교수에게 주면 20점짜리 문제도 10점은 받았다. 대학원 공부를 이렇게 대강해도 되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내 생각은 다르다. 이 공식이 실제 사회생활에서 쓰이냐 하는 것이다. 복잡한 공식은 대부분 컴퓨터 계산프로그램이 해준다. 내가 그 프로그램을 장래에 보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있다면 그때 가서 자세히 공부하면 어려울 것도 없다. 내 주장은 효과적인 측면에서 굳이 복잡한 수학 공식하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적이 기대 이상으로 나오자 박사과정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교수에게 장학금을 주면 박사과정을 해 보겠다고 했다. 원자력공학은 미국 내에서 인기가 아주 없어 대학원생 7명에 교수가 15명이어서 교수 연구비는 많아도 이를 뒷받침할 박사과정의 학생수가 매우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는 내가 30살 중반이라 나이가 많다고 탐탐치 않게 여겼지만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 워낙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보니 승낙을 해주었다. 박사과정을 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휴직을 신청했더니 휴직은 안 되고 사표를 내라고 해서 없던 것으로 했다. 몇 년 후부터는 공무원도 휴직을 하면 박사과정을 할 수 있게 되어 몇 년의 시간차로 ‘운명’이 바뀌었다. 3, 4 학기는 B가 섞여 나왔다. 나이 많은 학생이 뒤늦게 공부한다고 헤매는 것을 미국 학생들이 보고 처음에는 많이 도와주었지만 나오는 결과를 보니 그것이 아니어서 그때부터 견제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목마다 소위 시험에 잘 나오는 문제를 모아 놓은 ‘비책’이 있는데 볼 수가 없었다. 어차피 박사과정을 할 것도 아니어서 긴장이 늦추어진 면도 있었다. 5학기가 되자 고민이 되었다. 피해 갔던 수학과 물리를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내 능력 밖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유학생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찾아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대한민국을 전부 발로 여행하려면 몇 달이 걸리겠지만 위성으로 촬영하면 순식간에 할 수 있으니 수학을 이런 식으로 1시간에 요약해서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처음엔 못한다고 했다. 내 간청에 못 이겨 결국 하기로 했다. 요약 핵심 강의를 들어 보니 전체 골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것은 시간 나는 대로 챙겨 보면 되니까 걱정이 사라졌다. 물리도 그런 식으로 해결했다. 나에게 수학과 물리를 한 시간에 요약해준 유학생은 자기도 핵심내용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고 오히려 내게 고마워했다. 수학과 물리에서 당당하게 B를 얻었다. 따라서 좋은 성적으로 1년 3개월에 석사과정을 마쳤다. MBA에서 살아남기에도 도움 원자력석사를 마치고 10년이 지나 다시 공부할 기회가 왔다. MBA를 택했다. 요즈음은 그래도 MBA가 많이 알려져 있고 준비학원도 여러 개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무슨 과목을 배우는지, 한국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 공부하고 가야 되는지에 대한 일체의 정보도 없었다. 무식하니 용감하고, 사전 지식이 없으니 그냥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첫 학기는 이론 공부였다. 경영학, 경제학, 회계학, 조직이론, 마케팅과목에서 공부할 내용이 엄청 많았다. 매 시간마다 교수가 읽어보라는 참고 자료만 해도 기가 질렸다. 나는 평생을 이공계 분야에 있었기에 상경계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이해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 많은 것을 3개월에 하다니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보니 그들은 이미 학교에 오기 전에 사전 공부를 하고 왔다. MBA과정은 치열한 시장경제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기에 그 과정 자체가 ‘정글에서 살아남는 과정’이다. 나는 이러한 정글에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뛰어든 꼴이었다. 공부할 내용이 많으니 나의 주특기를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목표를 낙제하지 않기로 잡았다. 정 글에서는 ‘영광’이 필요 없었다.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었다. 상경계 과목을 소설책 읽듯이 읽었다. 핵심만 파악하고 상세한 것은 무조건 건너뛰었다. 시험은 60점만 넘겼다. 성공이었다. 그러나 시험 성적이 워낙 낮다 보니 리포트 성적이 나뿐 마케팅은 낙제하였다. 재시험에서 가까스로 통과하고 내 뒤에 처진 학생은 울면서 보따리를 쌓다. 사회생활에서도 경쟁력 직장에서 나는 비교적 승진이 빨랐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산업화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대부분 승진이 빨랐지만 나는 평균이상이 되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사안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핵심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는 능력은 전적으로 나의 책 읽기에서 왔다. 승진이 빠르니 퇴직도 일찍 올 것으로 예상했다. 제2의 인생을 위해서 10년 전부터 준비했다. 공무원으로 있을 때에는 제 2의 인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퇴직을 하니 결국 ‘이공계글쓰기’라는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10년 후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형상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이 어렵지만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산골에 ‘글 익는 마을’을 만들어 이공계 가족은 누구나 며칠 씩 들려 자연에 몸을 맡기고 뒹굴다 심심하면 책을 읽는 그러한 장소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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